신청하기 →
← 에세이 전체 목록
DEATH LITERACY · ESSAY

기가 센 백말띠 따님은
죽음을 대차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90년생 백말띠 여성은 드세고 기가 세다는 한국 사회의 미신이 있었다. 1990년에는 여아 100명 당 남아가 116.5명이 태어났다. 이는 대한민국 통계 이래 역대 최고 수준의 성비 불균형이라고 한다. 그 확률을 뚫고 태어난 여성 중 한 명이 바로 나다. 살면서 나는 정말 기가 센가? 문득 한번씩 일상을 돌아보는 건 60년에 한 번 나온다는 백말띠 여성의 무의식적 습관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개인적 지향과 달리, 만 36세가 된 지금까지도 엄마, 아빠의 슬하를 벗어나본 적이 없다. 유난히 작았던 키와 체구, 항상 몸보다 큰 가방을 메고 다녔던 어린 시절을 지나, 평균 신장 이하의 성인이 됐다. 잔병치레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초년생으로서 업무 과부하에 시달리던 20대 땐 연 1회 이상 입원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험한 세상에서 나의 부모님은 내가 신발장에서부터 신발을 신고 나갈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했을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렇게 기가 센 딸이기는 커녕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다.

어린시절 신아베. 2살 터울 언니보다 머리 하나가 작다.
작고 귀여웠던 어린시절, 2살 터울 언니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서는 내가 가장 기가 세 반항을 일삼았다.(누군가에겐 정말 별 거 아닐지도) 부모님의 보호와 통제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큰 목청, 겁 없는 모험심에 재밌어 보이는 건 도전하고, 말도 안되게 정한 통금시간을 어기기 일쑤였다. 작고 약한 둘째딸이 최대한 안온한 일상을 누리기만을 바랐던 아빠의 "어디서 이런 게 나왔냐"는 극대노에 "백말띠라서 그래!!!"라고 응수하는 건 되바라진 둘째딸의 레퍼토리다. 집에서는 가장 기가 세지만 자발적으로 세상 밖에 나가 도전을 무릅쓰기엔 한 없이 겁쟁이인 우리집 장군, 그게 내 자아다. 이런 나는 요즘 "죽음"을 이야기하는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중이다.

<죽음문해력커넥트>는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이하 AFA)로 인연을 맺은 프로젝트 팀이다. 아산나눔재단의 사회혁신 리더 양성 프로그램 AFA에 나를 포함해 비영리 섹터의 중간/최고관리자 30여명이 입학했다. AFA는 입학과 동시에 "가장 해결하고 싶은 사회문제"를 한 명씩 들고 오게 하고, 그 중 하나를 골라 팀 프로젝트로 정한다. 내가 속한 4조는 "죽음"을 골랐다.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 15기 입학식 오리엔테이션 기념 단체 사진
지난 4월,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 입학식 오리엔테이션 기념 사진

한국 사회에서 죽음은 대체로 금기이거나 재수 없는 소리, 아니면 병원의 언어다. 3040 세대에게는 특히 그렇다. 우리는 그 벽을 넘어, "밥 한 끼 하자"만큼 가벼운 무게로 죽음을 일상 대화에 들여오는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살아온 날을 회고하며 남은 생을 더 잘 살아보자는 6070 세대의 웰다잉과 차이를 둔 것이다.

호주의 한 대학이 처음 제시한 "죽음문해력(Death Literacy)"은 개인과 공동체가 돌봄과 임종, 죽음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역량을 말한다. 호주는 이걸 지수(Death Literacy Index, DLI)로 측정까지 한다. 그래서 지난 9월 중순, 우리는 시드니와 멜버른으로 갔다. 개인적으로 놀란 건 두 가지였다. 호주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는 여전히 조심스러워 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국가와 사회가 "끝까지 존엄하게"를 붙들고 천천히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 그 미묘한 온도차가, 오히려 우리에게도 닿을 수 있겠다는 확신을 남겼다.

라트로브 대학교 공중보건학과 이소라 교수님, 스윈번 공과대학 간호학과 에이미 킴 교수님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
호주에서 죽음문해력을 연구하고 있는 라트로브 대학교 공중보건학과 이소라 교수님, 스윈번 공과대학 간호학과 에이미 킴 교수님과 함께

다시 나의 성장 배경으로 돌아와볼까? 만 36살이 되기까지 엄마, 아빠와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으면 어떤 어른이 되는지 적어보고 싶다. 일단 너무 가깝고 익숙하며 존재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모르고, 서로의 부재를 상상하지 못한다. 부모님과 한 집에 살면서도 그들이 어떤 일상을 사는지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 번씩 함께 식사를 하거나, 은행 어플 사용법을 알려줄 때 깊어진 주름과 노안의 상태를 본다. 서울 지하철 무료 이용 우대권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아버지의 메시지에 축하한다는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문득 이상해진 기분을 느끼지만 티를 낼 수는 없다. 매일 가까이에서 자주 부모님의 노화와 노쇠를 느끼지만 그것만을 내내 관찰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바쁜 일상을 핑계로 살가운 인사를 전하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니 처음에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자마자 눈물이 났다. 꼭 나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전하는 죽음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주책 없이 눈물샘이 고장나 민폐를 끼치는 기분이 온몸을 사로 잡았다. 빛의 속도만큼 빠른 의식의 흐름이 가장 가깝고 소중한 이들과의 이별을 떠올리게 했다. 기가 센 백말띠 여성이 주책 없이 눈물을 보이다니 용납이 안되는 부분,, 이걸 이겨내고 싶었다. 그게 바로 이 프로젝트를 열심히 하는 이유다. 누군가의 슬픔에 당사자보다 유별나게 울지 않고 그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나아가 엄마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마음. 엄마가 없는 세상을 차차 상상해보기 시작하고, 보다 건강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훈련을 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언젠가 엄마와도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딸. 내게 죽음문해력이 생긴다면, 그 모습이길 바란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죽음을 이야기한다. 엄마에게 언젠가 한 마디 건넬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엄마,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알아?"

신아베
죽음문해력커넥트 · 아름다운재단 브랜드커뮤니케이션팀 팀장
죽음문해력커넥트

죽음문해력커넥트는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AFA) 15기의 프로젝트팀으로, 비영리재단·기업재단·재단법인·직업사관학교·소셜벤처 등에서 일하는 6명이 모여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정보를 연결한다"는 방향으로 활동합니다. 한국형 죽음문해력 지수(DLI/K) 개발, 3040 죽음문해력 아카데미, 유언장 쓰기 클래스, 죽음문해력 축제 「데스티벌」 등을 운영하며 죽음을 일상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듭니다.